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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쓰고 버리는 값싼 부품이 아니다” 특성화고 졸업생들 노조 설립

전국특성화고졸업생노동조합 조합원들이 1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노조 설립을 알리는 기자회견을 마치고 등 뒤에 쓰인 ‘우리가 바꾸자’ 구호를 보여주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최미랑 기자

“지난 2016년 구의역에서 컵라면도 먹을 시간이 없이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던 스무살 노동자, 2017년 제주도에서 현장 실습 중에 홀로 압사한 열아홉 살 노동자, 2018년 남양주 이마트에서 무빙워크를 수리하다 세상을 떠난 스물 한 살의 노동자. 모두 특성화고등학교를 다닌 청년이었습니다. 추모하는 것만으로는 사람이 죽어나가는 현실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더 이상 학생이 아닌 노동자로서 권리를 지키기 위해 노동조합을 만들기로 뜻을 모았습니다.”

노동절인 1일 특성화고 졸업생들이 노조를 만들었다. 전국특성화고졸업생노동조합은 이날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특성화고 졸업생들이 겪는 차별과 부당한 행위들을 바로잡기 위한 활동을 시작할 것”이라고 밝혔다. 현장실습을 나간 특성화고 학생과 졸업생의 연이은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모였던 이들이 주축이 됐고, 지금까지 100명이 가입 의사를 전했다. 대부분 사회에 막 나간 스무살 노동자들이다. 이들은 선언문에서 “조금 더 일찍 사회에 진출하기 위해 두 배 세 배 노력하며 살아가는 특성화고 졸업생들은 값싸게 쓰고 버릴 부품 쯤으로 여겨진다”며 “목숨까지 잃을 수 있는 열악한 노동환경, 차별과 무시, 편견이 사라지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특성화고 학생들은 실습 현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면서도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졸업 후에는 위험한 일에 내몰리거나 고졸이라는 이유로 갖은 차별을 받고 있다고 호소해왔다. 노조 결성에 앞서 지난해 11월에는 특성화고등학생권리연합회가 출범했으며 700~800명의 학생들이 모여 사단법인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차별, 무시 직접 바꾸자" 특성화고 학생들의 조직된 힘

노조가 학생과 졸업생을 상대로 실태를 조사해 보니 실제로 업무나 임금에서, 혹은 일상적으로 차별을 받는 일이 많았다. 음식 조리를 전공해 취업했는데 식당 서빙을 시키거나, 사무보조 공고를 보고 지원했는데 주차 관리를 맡기는 식이었다. 디자인 전공으로 입사해보니 경리 업무를 해야 했던 경우도 있었다. 똑같이 간호조무사로 일해도 고졸이라는 이유로 임금을 적게 줬다. 현장실습을 나갔다가 성희롱이나 성추행을 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지난달 특성화고등학생권리연합회가 회원 4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노동환경 기초조사’에서도 강제야근이나 특근 같은 ‘장시간노동’(24%), ‘고졸이어서 받는 차별과 무시’(23%), ‘연장노동수당 없음’(18%), ‘성추행·성희롱’(12%), ‘임금체불’(10%), ‘최저임금 미달 월급’(9%) 등으로 고통받는다고 답한 이들이 많았다.

노동절 기자회견에서 특성화고 졸업생 이은아씨(20)는 “우리도 전공이 있고, 취업을 하면 연수를 받아 (대졸 직원과) 동일선상에서 일을 시작하는데 고졸이란 이유로 ‘일자무식 어린아이’로 대하는 태도가 회사 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퍼져 있다”고 했다. “특고생을 뽑지 않았는데 할당이 주어져서 어쩔 수 없이 뽑았다”는 식의 비하발언도 흔하다고 했다. 이학선씨(20)는 “차별받지 않고, 모욕을 당하지 않고 사람답게 살게 해 달라고 말하기 위해 나왔다”며 “근로기준법도 지키지 않은 채 우리를 쓰고 버릴 부품으로 대하는 회사에서 우리는 어떤 희망도 가질 수 없다”고 말했다.

이들은 2일 고용노동부에 노조설립신고서를 제출한다. 특성화고 졸업생의 취업환경 전수조사와 취업관리지원센터 설치를 노동부에 요구하기로 했다. 노조는 “교육부와 교육청이 논란이 돼온 현장실습을 관리감독한다 하지만, 누군가 숨지고 나서 뒷수습을 하는 식의 대책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고 밝혔다.

■ 전국특성화고졸업생노동조합 설립선언문 전문

<우리는 생각합니다>

컵라면으로 끼니를 떼울 시간도 없이 구의역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열차에 치여 숨진 열아홉살 특성화고 졸업생 청년노동자를 생각합니다. 무거운 감정노동에 시달리다 “콜수를 다 못채웠다”는 문자를 남기고, 끝끝내 숨진 열아홉살 전주 특성화고 현장실습생 노동자를 생각합니다. 생일을 닷새 앞두고 살벌한 프레스 기계에 끼어 숨진 열여덟살 제주 특성화고 현장실습생 노동자를 생각합니다. 다음달엔 여행을 갈 것이라고 이야기하며 작은 행복을 바라던, 이마트에서 무빙워크 수리 도중 몸이 끼어 숨진 특성화고 졸업생 스물한살 청년노동자를 생각합니다.

또래 친구들보다 조금 일찍 세상에 나선 그들은 채 꽃을 피워보기도 전에 죽어야만 했습니다. 행복을 바라며 부푼 꿈을 안고 세상에 나섰지만, 열심히 일했다는 이유로 죽어야만 했습니다. 무서운 세상이 그들의 죽음을 막지 않아서, 어쩌면 사람의 생명보다 돈이 우선인 어른들의 탐욕과 이기심이 죽음을 부추겨서 그들은 죽어야만 했습니다. 우리는 막을 수 있었던 죽음들을 다시 떠올립니다.

<‘너는 나다’ 우리는 그들입니다>

우리는 특성화고를 졸업하고, 생애 첫 노동을 시작하며 부푼 꿈을 안고 세상에 나선 특성화고 졸업생들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마주한 현실은 강제야간근로, 임금체불, 새벽까지 이어지는 장시간 노동이었고, 성희롱과 성추행을 비롯한 폭언과 폭력 속에서, 특성화고 출신이라는 이유로 당하는 모욕과 차별 속에서, CCTV로 노동하는 모습을 감시 당하는 가운데에서, 과도한 노동을 당연한듯 강요받는 분위기와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지 못하는 가운데에서. 그저 운 좋게 살아남았을 뿐입니다. 구의역 김군, 전주 홍양, 제주 이군, 이마트 이군. 너는 나다! 우리가 그들입니다.

<우리는 바랍니다>

우리는 꿈을 꾸고 싶습니다. 행복하고 싶습니다. 사람답게 살고 싶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 말들을 힘겹게 내어놓는 일은 슬프기만 합니다. 상식이 상식이지 못한 현실에 분노합니다. 특성화고 출신이라는 이유로, 특성화고 졸업생이라는 이유로 사회 속에서 온 몸으로 맞는 견고한 불의의 벽이 두렵기도 하지만,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이곳에 섰습니다. 분노를 느끼면서, 서러움을 느끼면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조금 더 일찍 사회에 진출하기 위해 두배 세배 노력하며 살아가는 특성화고 졸업생들이 전국 곳곳에서 값싸게 쓰고 버릴 부품쯤으로 여기는 회사가 없기를 바랍니다. 위험한 곳에서 일을 하고, 목숨까지 잃을 수 있는 열악한 노동환경이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특성화고 졸업생이기 때문에 이렇게 해도 돼! 라는 차별과 무시, 편견이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더 이상 성희롱, 성추행을 비롯한 폭언과 폭력을 당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정말 사람답게 살고 싶습니다.

<우리가 바꾸겠습니다>

우리가 가고자 하는 길은 멀고 험난할 수도 있습니다. 불의한 세상에서 오늘 우리의 선언이 우리의 목을 조르는 일이 될지도 모를 것입니다. 그래도 두려움 속에서 외칩니다. 혼자가 아니라 우리라는 이름으로 용기를 내봅니다.

누군가의 말처럼 “니가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야기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갈 이 사회에서 이제 더 이상, 억울한 사람이 없어야 하기 때문에, 마땅히 그래야 하기 때문에. 손톱만큼이라도 고쳐내고야 말겠다는 의지로 생애 첫 노동을 시작한 특성화고 졸업생들이 모여 우리의 걸음을 시작합니다.

2018년 5월 1일 세계노동절, ‘사람다운 삶’이라는 꿈을 향해, 전국특성화고졸업생노동조합의 설립을 선언합니다.

2018년 5월 1일 전국특성화고졸업생노동조합 조합원 일동

<최미랑 기자 rang@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