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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스토리] "마음 여린 여직원이 비상계단에 앉아 숨죽여 우네요"

(서울=연합뉴스) 이상서 기자 = "우리 직업은 콜센터 상담원이 아니라 '욕받이'입니다."



가전제품으로 유명한 한 대기업의 콜센터 상담원으로 일하는 김 모(36) 씨는 최근 흡연이 늘었다. 김 씨는 "일부 고객들이 전화를 걸어 밑도 끝도 없이 '야 이 씨X, 개XX 빨리 팀장 바꿔'라며 욕설을 퍼붓는다"며 "이렇게 30분을 통화하고 나면 머리가 어질어질할 지경"이라고 말했다. 이런 전화를 하루에 많게는 100통까지 받는다.

더 힘든 사실은 그렇게 받은 스트레스를 해소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김 씨는 "동료들끼리는 각자 알아서 풀자고 얘기한다"며 "나 같은 경우는 담배에 의지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흡연량이 하루 한 갑으로 늘었다.

지난 15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는 감정노동자의 피해에 대한 사업주의 대응조치를 의무화하는 내용의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고객의 폭언이나 폭행 등으로 건강 장해를 입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다.

감정노동자들의 마음이 멍들고 있다. 각종 조사에 따르면 이들 대부분은 고객으로부터의 욕설과 인격무시, 성희롱 등에 그대로 노출된 것으로 나타났다. 심리 상담이 필요할 정도로 우울 증세가 심한 이들도 절반에 가까웠다. 그러나 상당수가 선택한 방법은 바로 '침묵'이었다.

◇ 욕은 기본, 각종 폭력에 시달리는 감정노동자들



고객이나 승객, 학생, 환자 등 직장 동료가 아닌 사람들을 직접 상대하는 이들.

한국노동사회연구소가 정의한 감정노동자의 정의다.

지난해 서울연구원이 서울시 공공부문 감정노동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연구에 따르면 절대 다수가 부당한 경험을 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시민이나 고객으로부터 모욕적인 비난이나 고함, 욕설 등을 당한 경험이 있다고 밝힌 비율은 69.4%에 달했다. 특히 여성 감정노동자의 경우 72.7%가 겪었다고 답했다.

고객으로부터 위협이나 괴롭힘을 당한 비율은 46.1%였고, 구타 등 신체적인 폭력을 당한 경험은 20.8%였다. 심지어 원치 않는 성적인 신체접촉이나 성희롱을 당했다고 밝힌 비율도 19.3%로 나타났다.

고객의 갑질에 더 상처를 입은 이들은 여성 종사자다. 구타 등 신체적인 폭력을 제외하고 부당한 경험에서 남성보다 더 많이 노출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성희롱 피해 경험은 23.8%로 남성보다 10%포인트 이상 많았다.

◇ 위험 수준 다다른 감정노동자 상태



고객의 갑질은 마음을 멍들게 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택하는 데 이른다. 2016년 윤진하 연세대 의대 직업환경의학과 교수팀에 따르면 직무 자율성이 낮은 감정노동자가 받는 자살 충동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남성은 4.6배, 여성은 2.78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직업 특성상 감정을 드러내지 못하고 삭혀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감정노동자 중 26.3%는 "나는 감정을 숨기고 일해야 한다"고 답했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측은 "감정노동자들은 본인의 마음과 겉으로 드러내야 하는 상태가 괴리되는 현상으로 인해 우울감 등의 정신적 질환으로 나타나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서울연구원에 따르면 감정노동자 중 72.8%는 "일주일에 하루꼴로 상당히 우울한 감정을 느꼈다"고 답했다. "4일 이상"이라 말한 비율도 4.5%에 달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일주일에 하루 정도 든다고 답한 이도 79.4%로 나타났다. 또 감정노동자의 절반 이상이 일주일에 이틀 이상 잠을 설쳤다고 답했다.

콜센터 상담원인 김 모 씨는 "마음이 여린 여직원들이 복도 구석이나 비상구 계단에서 쪼그려 앉아 숨죽여 우는 모습을 거의 매일 본다"며 "욕설 담긴 전화를 하루 종일 받고서 멀쩡하다면, 그게 비정상 아니겠냐"고 말했다.

◇ 속으로 삭힐 수밖에 없는 이유는



"막무가내로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는 고객들을 만나도 대처할 방법이 없었어요. 그냥 참고 삭힐 뿐이죠."

서울의 한 대형백화점 내부에 있는 VIP 라운지에서 1년간 근무한 경험이 있는 신 모(22) 씨는 당해도 참는다고 했다. 신 씨는 "규정상 안 된다고 거절하면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며 되레 언성을 높이는 고객들이 많았다"며 "실랑이가 이어지면 결국 고객센터에 항의하는 경우가 많아서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심지어 '아가씨'라고 부르면서 사는 곳을 물어보는 고객도 있었다"며 "이때도 참고 넘기는 게 최선이었다"고 덧붙였다.

신 씨처럼 감정노동자가 부당 행위에 대해 택한 방법은 인내와 침묵이다. 서울연구원에 따르면 이들 중 95.7%는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하지 않으려 노력했다고 밝혔다.

감정노동자 중 86.1%가 고객이 무리한 요구를 하더라도 참아야 한다고 답했다. 고객이 폭언하더라도 참아야 한다고 답한 이들은 77.9%였고, 분쟁이 발생할 경우 무조건 사과해야 한다고 답한 이들도 83.7%에 달했다.

조직 역시 적극적인 대응을 피하는 편이다. 콜센터 업체 중 근로자가 폭언을 들어도 무조건 사과해야 한다는 방침을 가진 조직은 절반이 넘었다. 성희롱을 당해도 전화를 끊지 말아야 한다는 방침을 가진 조직도 46.1%에 달했다.

한국노동연구원 측은 "이런 현상은 위탁 업체일수록 심한 편"이라며 "고객이 민원을 제기하게 되면 위탁 업체는 원청 업체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부당한 처사에도 소속 근로자에게 참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출처=아이클릭아트

이런 이유로 고객 응대를 회사가 지속해서 관찰한다고 답한 감정근로자는 83.3%에 달했다.

감정근로자 중 상당수가 계약직이나 파견직 등 불안정한 고용 상태에 놓인 점도 적극적인 대처를 주저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한국노동연구원에 따르면 백화점이나 대형마트 등에서 판매직으로 일하고 있는 감정노동자 중 전일제 정규직은 11.7%에 불과했다. 실제로 이들 대부분은 백화점이 아닌 파견업체 등에 소속된 기간제 노동자로 나타났다.

고객을 왕이라고 여기는 문화도 문제다. 유명 항공사에서 8년째 스튜어드로 근무 중인 안 모(36) 씨는 "회사에서 마련한 '고객의 소리함'은 양날의 검"이라고 말했다. 안 씨는 "여기에 고객 의견이 올라올 경우, 승무원에게는 일종의 형벌이 된다"며 "승객의 불만이 들어오면 일단 죄송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라고 비판했다.

그는 "해외 항공의 경우, 승객과 승무원은 '갑을 관계'가 아닌 '동등한 관계'로 여긴다"며 "우리도 이와 같이 인식을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우리도 퇴근하면 누군가의 고객"



전문가들은 상담 창구나 보호 제도 확대와 함께 사업주의 예방 의무 강화가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박찬임 한국노동연구원 박사는 "감정노동자 중에는 정규직 근로자가 아닌 경우가 많은데 이들도 보호망 안에 포함해야 한다"며 "가령 콜센터 상담원의 상당수는 프리랜서나 특수형태고용종사자 등의 신분인데, 고객들의 부당 행위에 그대로 노출될 가능성이 더 크다"고 지적했다.

감정노동자의 주요 가해자인 일부 고객에 대한 처벌 강화와 함께 기업의 적극적인 대처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다.

박 위원은 "폭언이나 욕설, 성희롱 등 부적절한 행위를 벌인 고객을 회사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고발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며 "과거 다산 콜센터가 성희롱 등의 발언을 한 고객을 고발 조치한 것이 좋은 예"라고 말했다. 그는 "전화를 끊을 수 있는 권리가 고객 매뉴얼에 없는 회사가 여전히 많다"고 덧붙였다.

출처=아이클릭아트

감정노동자를 보살피고 스트레스를 완화할 제도의 도입도 시급하다. 한국노동연구원에 따르면 스트레스 완화 프로그램을 마련해 놓은 콜센터 사업장은 3곳 중 1곳에 불과했다. 또 전문상담사를 고용한 비율은 19.1%, 고충 처리 위원회 설치 비율은 16.9%에 그쳤다.

한인임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위원은 "이번 상임위에 통과된 감정노동 보호법안에 부족한 것은 바로 '예방책'"이라고 지적했다.

한 위원은 "일이 발생한 뒤 대처 방법이나 처벌에 대한 내용은 있지만, 그에 앞서 사업주가 예방책을 세워야 하는데 그 의무가 사실상 누락된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을의 위치에 놓인 감정노동자는 스스로 권익 찾기가 힘들기 때문에 사업주가 나서서 이들을 보호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서울의 한 커피 전문점에서 근무하고 있는 A 씨는 "우리도 퇴근하면 누군가의 고객이자, 똑같은 사람들"이라며 "그 사실만 생각한다면 이처럼 막 대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인포그래픽=장미화 인턴기자

shlamazel@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