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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했는데 새 직장서 '합격취소'.. '채용갑질'에 우는 이직자들

새 회사 변심에 9년 직장 잃기도… 경력직 채용 늘면서 피해 증가
규정 없는 상황… 행정지침 필요 ‘합격 문자 등 있으면 손배 청구 가능’

A씨(29·여)는 6개월간 다니던 직장 사정이 나빠져 이직을 결심했다. 지난달 면접을 봤던 한 회사에서 “채용이 내정됐다”는 합격 통보 전화도 받았다. 다니던 직장에는 곧 그만두겠다고 알렸다.

하지만 새 회사는 3일 뒤 갑자기 “채용을 다시 고려해 보겠다”고 말을 바꿨다. 이유도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았다. A씨는 원래 있던 직장에 양해를 구해 퇴직은 없던 일이 됐지만 눈치가 보여 마음이 불편했다. 그는 “주변에 이직하려다 채용이 취소된 사례가 종종 있다”며 “근로계약서를 쓰지 않아 대응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고 말했다.

이직 과정에 있는 직장인들의 불안한 지위에 대한 법적 장치가 미흡한 것으로 나타났다. 채용 내정 상태 등의 지위 규정이 없어 구직자들은 사측의 ‘변심(變心)’에 당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합당한 이유 없이 채용이 취소되면 다른 회사에 다닐 기회도 놓치고 다니던 회사에 다시 돌아가기도 어렵다.

B씨는 내정된 채용이 취소되는 바람에 9년간 다니던 직장을 하루아침에 잃었다. 2016년 3월 그는 이직하려고 다른 회사 면접을 보고 채용이 내정돼 연봉협상까지 마쳤다. 새 회사는 “회사 일이 늘어 급하게 사람이 필요하다. 하루라도 빨리 와 달라”는 부탁까지 했다.

B씨는 이튿날 다니던 회사에 사직서를 냈다. 인수인계를 하고 8일 뒤 그만두기로 했다. 하지만 퇴사하던 날 새 직장에서 “후반기 회사 매출이 저조할 것으로 예상돼 입사가 어렵게 됐다”는 전화가 왔다.

서울에 사는 C씨도 지난해 6월 한 중소기업에서 사장 면접을 봤다. 면접 중 연봉을 결정하고 출근일도 정해졌다. 이 기간 동안 C씨가 지원했던 다른 회사에서도 채용의사를 알려왔지만 거절했다. C씨 역시 새 직장 출근 하루 전날 돌연 “입사가 미뤄졌지만 정확한 기간은 말할 수 없다”는 연락을 받았다.

노동계에서는 채용내정이나 시용 등 정식고용 이전 단계의 고용관계를 ‘과도적 근로관계’라 칭한다. 그러나 근로기준법에는 이에 대한 규정이 없다. 채용내정의 취소로 분쟁이 발생했을 때 근로자들의 권리보호가 취약한 상태인 것이다. 근로계약서도 언제 써야 하는지 시기에 대한 규정이 없는 데다 현실적으로 이직 후 첫 출근도 하기 전에 계약서를 쓰는 곳은 드물다.

한국노총 부천상담소 ‘노동OK’의 박덕수 소장은 29일 “채용내정 사실을 통지한 후 정당한 사유 없이 취소하면 불법행위로 볼 수 있어 손해배상 책임을 물을 수 있지만 구제받을 수 있을지는 사안별로 다르다”며 “근로기준법도 채용내정에 관한 명확한 설명이 없다”고 말했다.

박봉규 공인노무사는 “채용내정 사실, 채용조건 등을 알린 문자나 이메일을 확보하고 있다면 구제 받을 가능성이 있다”며 “모집공고(유인), 입사지원과 면접(청약), 합격통보(승낙)의 절차가 이뤄져 계약서를 쓰지 않아도 근로계약이 이미 성립됐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구두 통보를 받은 경우 녹취를 하지 않았다면 구제가 쉽지 않다.

김성희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교수는 “과거에는 이직이나 경력직 채용이 많지 않아 법적 규정을 만들 필요성이 크지 않았다”며 “정부가 채용내정 취소가 합당한지를 가리거나 근로감독관이 채용절차를 관리 감독하도록 행정지침을 마련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했다.

최예슬 기자 smart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