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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 생애 첫 노동’ 특성화고 졸업생…“넌 검은색 스타킹 어울려” 갑질에 운다

ㆍ좌절·분노가 된 취업 현장
ㆍ성추행 항의에 협박성 발언…‘회계’ 전공자는 운전·배달도
ㆍ학교 노동인권 교육 ‘형식적’…단계별 피해 대응법 배워야

특성화고에서 회계 분야를 전공한 ㄱ씨(20)는 졸업 후 곧바로 취업에 성공했다. 부푼 꿈을 안고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그가 맞닥뜨린 것은 좌절과 분노였다. 회사는 그에게 회계 업무는 시키지 않았다. 전공과는 무관한 사무보조는 기본이고, 운전이나 배달 일까지 맡아야 했다. 야근을 하고 주말에도 출근했지만 수당은 없었다. 남들보다 빨리 사회생활을 시작해 업계에서 인정하는 전문가가 되겠다는 그의 야망은 신기루가 돼가고 있다.

14일 전국특성화고졸업생노동조합에 따르면 ㄱ씨처럼 본인의 전공과는 무관한 일을 하고, 특근수당은 물론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는 특성화고 출신 노동자들이 적지 않다. 이들에겐 고졸자, 초급기술자라는 차별과 무시, 편견이 족쇄처럼 따라다닌다.

“넌 커피색 스타킹보다 검은색 스타킹이 어울려.”

특성화고 졸업생 ㄴ씨가 직장 상사에게 어느 날 뜬금없이 들은 말이다. 또 다른 회사에선 상사가 허벅지나 엉덩이를 툭툭 치고선 “어리니까 내 딸 같아서 그래”라며 성추행을 일삼았다고 한다. 가만있지 않겠다고 하면 “할 테면 해보라”는 식의 협박성 발언만 돌아올 뿐이었다. 역시 특성화고 출신인 ㄷ씨는 현장실습생이 있는 회식 자리에서 “특성화고 애들은 뽑기 싫었는데 정부 정책상 어쩔 수 없이 뽑았다”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현장실습생들의 잇단 죽음으로 사회적 관심은 커졌지만 이런 분위기는 여전하다. 특성화고등학생권리연합회가 지난 4월 벌인 조사 결과 특성화고 졸업생들은 취업 후 가장 큰 어려움으로 ‘강제야근 등 장시간 노동’(24%)을 꼽았다. 이어 ‘고졸이라 받는 차별과 무시’(23%), ‘연장노동 수당 미지급’(18%), ‘성희롱·성추행’(12%), ‘임금체불’(10%), ‘최저임금보다 못한 임금’(9%) 등이다.

기술·기능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특성화고는 전국에 511곳, 서울에만 74곳이 있다. 이명박 정부는 취업률에 따라 학교 지원금을 달리하고, 학교 통폐합도 진행했다. 결국 이 같은 학교별 경쟁은 현장실습의 질을 낮췄고, 특성화고 졸업생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낳게 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서울시교육청 관계자는 “40~50년 전처럼 고졸 출신이라는 이유로 힘 약한 노동자를 막 대하는 고용주, 나아가 대졸자를 우선시하는 사회 분위기가 그들을 추락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특성화고 졸업생들이 제대로 대우받지 못해 낙오하면 외국인노동자로 메우고 있는 기업들은 핵심인력을 확보하지 못하게 되고, 국가 성장동력에도 악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취업 전 학교에서 진행되는 노동인권 교육도 문제점으로 꼽힌다. 특성화고 학생들은 3학년 때만 공인노무사로 구성된 노동인권 전문 강사로부터 교육을 받는다. 교육도 신청 학교에 한해서만 진행된다. 더군다나 학급별이 아닌 학년 전체가 모여 한두 시간 교육하는 걸로 끝난다. 홍소영 서울노동권익센터 교육홍보팀장은 “현장실습이나 취업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학생들은 다양한 상황에 따른 대처 방안, 근로계약서 작성 등 실제 필요한 정보를 원하지만, 1회 2시간짜리 집합교육은 이런 요구를 수용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특성화고 졸업생 ㄹ씨는 “노동인권 교육을 국·영·수처럼 필수과목으로 넣고 단계별·수준별로 교육을 진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권식 서울지방고용노동청 근로개선지도과장은 “특성화고 졸업생들이 직장 갑질 등 피해에 노출돼 있다는 데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서울시는 사업장 근로감독 권한을 갖고 있는 고용노동청, 특성화고 졸업생들이 근무하는 사업장 정보를 관리하는 서울시교육청과 협업해 올해 하반기에 특성화고 졸업생들의 노동인권 보호 대책을 수립할 계획이다.

<고영득 기자 godo@kyunghyang.com>